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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상의 역설, 구성*構成)의 욕망, 혹 욕망하는 구성을 통해 지필묵의 전통으로 되돌아가기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오늘의 의미로 되묻기
문인상의 회화는 전통산수화가 자연을 취하는 방식에서 자양분을 취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 교훈을 반추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출범하게 했던 그것으로부터 떠나고자 부단히 애써 오기도 했다. 문인상이 지필묵 사상의 뒤쳐지지 않는 옹호자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없지만, 그것이 전통의 미명으로 자행되는 교조주의적 반복을 허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 여기서 지필묵을 운용하는 주체, 그 운용을 통해 비로소 그것이 존재의 한 첨예한 방편이 되게끔 하는 그런 주체를 결여한 전통은 고작 수구에 퀘퀘한 이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인상은 그 지점을 다음과 같이 짚고 있다.

"나는 지필묵이란 전통을 오늘의 의미로 되돌려 묻는다."

하지만, 이렇게 지고의 역사를 현재에 응집시킬 것인가? 어떻게 부단한 진행을 하나의 정지된 시점과 공존시키고, 그 위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게 할 것인가? 

회화의 자연-스스로 그렇게 되어가는-에 대하여
문인상은 질문을 던졌던 바로 그 시점에서 부단히 답을 모색한다. 그리고 면면(綿綿)한 문인화 정신, 지필묵의 전통에서 작가는 새로운 시대를 열 '소요의 미학', '방임의 시방식'을 발견한다. 실로 그에게 전통은 관조와 몰입, 사물과 사의(寫意) 간의 깊고 오묘한 보고(寶庫)였다.

이 전통으로부터의 사유는 미술에 통째로 자연의 개념을 이식시키려 했던 서양미학, 특히 급기야 미술에 고도의 자율성을 부가하기에 이르렀던 모더니즘 미학의 그것과는 극히 상반된다. 돌이켜보자. "미술은 그 자체며, 그 자체가 되어가는 것이 궁극"이라는 모더니즘의 미학적 사유가 이 얼마나 매섭게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질타해 왔던가. 개괄해보자면, 서양미술사는 미술을 '고도의 자연' 즉 스스로 완성되어가는 것으로 규정하기 위해, 정작 자연의 미(美)와 그에 대한 경외심을 타락시켜 온 편협한 연대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서양미술사는 이 두 자연 간의 지루하고 공허한 갑론을박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문인상이 언제나 돌아와 새 출발을 다짐하는 문인화의 사유에선 이 두 자연은 상호대립적이지 않다. 여기서 예술은 자기 자연 안에 자폐되지 않아도 되고, 또 자연에 대한 깊은 경의가 인간이 심오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이 두 세계 간의 이분법은 허무맹랑한 가정이요, 인식의 피상성이 헤집어놓은 혼돈에 지나지 않는다. 문인상은 자신을 덜 개입시킴으로써, 인식을 절제하거나 후퇴시키는 방식을 통해, 회화의 자연을 실천해 왔다. 그것은 회화 스스로가 어떤 '자발적인 차원' 즉 싹이 트고 자라 꽃과 열매를 맺는 것 같은, 자체 내에 완성을 지향하는 에너지를 지니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회화를 자연에 바짝 밀착시킬 수 있었다.

회화에 자연의 '스스로 완성되어가는 속성'을 실현하기 위한 작가의 방식은 두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무념무상에 이끌리는 붓질을 끝없이 반복하고 채색의 층을 더해 가는 것이다. 이에 의해서는 의도하지 않은 임의의 한 시점에서 바탕이 완성된다. 두 번째는 이렇게 형성된 바탕 위에 소묘들을 가볍게 투사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소묘는 간략한 사생이나 특징만으로 포착된 밑그림 정도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규정적이거나 결정적인 대신 스스로를 열어놓았다는 의미로서 소묘다. 그러므로 그의 소묘들이 바탕의 문맥을 교란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지의 최소한의 개입, 가뿐하고 투명한 신체, 바탕의 시간성 위로 슬쩍 얹혀지기... 문인상의 소묘가 그려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