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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삶 -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

김이천 / 미술평론가 

오월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찾은 곳은 팔당역 근처의 산마을 초입이었다. 그곳은 높고 낮은 몇 개의 산봉우리가 배경을 이루고 짙푸른 녹음과 계단식 논밭이 주변을 뒤덮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모습을 하고 있었다. 황토빛 길 위에 겹겹이 뿌려진 하얀 감꽃과 녹색 잎사귀 속에서 더욱 붉어진 장미꽃이 시야를 벗어나 잔상으로 남아들기 시작할 무렵 발길을 세웠다. 소 외양간을 개조한 30여 평 크기의 화실이 발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작가 문인상은 작년 3월에 서울 잠실의 화실을 처분하고 이곳에 새로이 창작의 둥지를 틀었다. 서울 시절의 마감이자 팔당 시절의 개막인 셈이다. 이처럼 환경적으로 한 시대가 교차하는 것인 만큼 작품도 변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화실 문턱을 넘어섰을 때 눈동자 속으로 빨려든 것은 1호에서 1000호까지의 다양한 크기의 많은 작품들이었다. 그 작품들 대부분은 짧은 팔당 시절에 이루어진 것들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새 시대의 작품들은 이전 작품에서 진보된 새로운 변화로써 예비한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예술에 있어서 변화, 새로움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변화는 새로워지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낡은 것을 허물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일종의 자기혁신 같은 것이다. 그러나 변화를 꾀하기란 쉽지 않다. 이미 몸에 익숙해진 행동 양식과 주어진 의식 체계는 일시에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술은 변해야 한다고 믿는다. 시대가 변화하듯이 변화는 자신 발견에서부터 시작된다. 자기 발견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이해와 보다 풍부한 지식과 정보의 축적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실천력이 요구된다. 
사실, 주변에서 변화하지 않는 수많은 작가들을 보아왔다. 변화에 대한 능력이 없는 탓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 능력이 충분함에도 결과적인 위험부담을 우려한 탓에 변화를 주저했던 것이다. 위험 부담이란 변화를 갖기 전보다 질적 수준이 떨어지거나 그 동안 쌓아온 상품적 가치의 하락을 뜻한다. 어쩌면 전자보다는 추자가 작가의 변화를 막는 더 큰 원인일 것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변화하지 않고 수 십 년을 똑같은 내용과 형식으로 일관하는 작가들을 두고 '천착(穿鑿)'하는 작가로 미화시키기도 한다. "어떤 사물에 깊이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하는 일"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천착도 변화가 전제되어야 제대로 되는 것이다. 천착은 이미 쌓았던 업적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그 과정은 끊임없는 자기 혁신과 변화의 과정이어야 한다. 

작가 문인상은 이러한 변화와 천착사이에서 참으로 많은 고민을 해왔다. 남도지방의 수묵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먹을 다루는 끼를 물려받았던 작가는 남도특유의 문인화와 전통 수묵화법을 부지런히 다지기 시작했다. 화가 지망생들 대부분이 수채화를 전공하던 고등학교 시절에 그는 남종화풍의 실경 산수를 그려 각종 실기대회에서 큰 상들을 일궈내기도 했다. 수채화를 전공하는 동료들과는 달리 선배로부터 그림 지도를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소외감을 많이 받았을 터이지만 그는 수묵화를 전공으로 삼아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진학 후의 주변환경은 그를 가만 놓아두질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고향광주가 80년의 아픔에 휩싸인 것이다. 광주의 충격은 그로 하여금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다. 자연스럽게 버림받고 소외된 삶의 현장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행상, 노인, 광부 등 서민의 삶과 그 삶의 터전인 산동네, 공사장, 판자촌 같은 풍경들을 이미 쌓은 전통 수묵화의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렸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밑바닥 인생의 삶은 고뇌에 차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표상되었던 것이다. 다만 그것들은 이전의 부드러운 필치의 실경 수묵화와는 달리 점차 강한 필력으로 드러났다. 

고뇌와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서민 삶의 의지, 희망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그는 과거의 관조적인 자연 사생에서 현실 참여적인 인간 형상의 표상으로 작품의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첫 변화였다. 

그러나 이같은 자연에서 인간으로, 관조에서 현실 참여로의 의식과 표현의 전환은 보다 강력한 조형수단을 요구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이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자신의 조형 언어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에 주류로 작용했던 수묵담채 기법을 조금씩 버리는 대신에 다양한 색채의 사용빈도를 높여갔던 것이다. 이제는 먹빛보다는 채색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통 한국화의 재료와 도구뿐만 아니라 아크릴릭이나 나이프 같은 서양화나 조각의 그것들까지도 주제의 조형적 표현을 위해 이용했다. 이제 가는 주제소재의 변화뿐만 아니라 조형어법까지 변화시키는 과감한 자기혁신의 꾀하게 된 것이다. 
작품의 주제인 인간을 형상화함에 있어서도 그는 이전의 사실적인 모사(模寫)중심의 작업태도를 버리고 생략과 왜곡의 주관적 표현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미지의 왜곡과 생략은 사실적인 그림보다는 더욱 보는 즐거움을 주기 마련이고, 직설이 아닌 이상 그 의미파악을 위한 생각과 유추를 이끌어냄으로써 작가와 관객간의 새로운 소통을 열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쉽게 무엇이구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자체의 이미지와 주변 이미지 간의 상관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감상하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 만큼 작품의 의미는 은유적이고 풍자적이고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형상의 왜곡과 생략으로 인간 삶을 긍정보다는 부정과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이같은 어둡고 무거운 인간 형상의 그림은 앞서 얘기했듯이 광주의 아픔과 무관하지 않다. 그 역시 그다지 화려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팔당 시절 이전에는 참으로 많이 전전긍긍했다. 선배나 동료의 화실 신세를 지면서 작품을 했는가 하면, 그나마 친구의 도움으로 작은 건물의 옥상 층에 마련한 화실마저도 불에 타 작품과 책, 자료들을 잃는 아픔까지도 겪었다. 또 그 아픔 뒤에 얻은 서울 신천의 화실도 새마을 시장을 끼고 있어서 역시 소외된 일상들을 자조 접하는 곳이어서 그 소외와 아픔과 치열한 일상들이 작품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자신과 주변의 "삶을 되풀이해서 음미하고 생각"하면서 그린 '삶반추(反芻)의 장'연작들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실험적인 어두운 작품들로 92년에 관훈미술관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반추의 그 주체는 당연히 작가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만 여기지 않고 서민의, 대중의, 우리 모두의 삶으로 설정했다. 왜곡과 생략의 인물 형상으로 표상된 어두운 그림들은 현대인의 해체된 자아, 실존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짙게 깔고 있다. 
 2년 뒤에 가진 두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또다시 변화를 꾀한다. 인간에서 자연으로 관점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수묵담채화로 그렸던 그런 관조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으로서의 자연은 아니다. 앞서의 인간(실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여전히 그 내면에 녹아 있다. 이전에 가끔 보였던 소나무나 닭 돼지 달 산 연꽃 대나무 구름 등의 자연이 인간과 교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여전히 자신의 반추하는 삶이 주제로 은연중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다시 1년 뒤 그는 보다 다양한 색채의 작품으로 세 번째 개인전을 연다. 다양한 색채 사용에도 화면은 밝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지난 개인전보다 인간 표현이 상당히 줄었다. 그리고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의 석불들이 절 연꽃 말 목어 등의 불교적 상징물과 함께 등장했다. 그는 이제 관심사를 자신과 현실로부터 역사적 산물인 전통에까지 확대한 것이다. 
 그는 현실 세계의 또다른 갈등 구조인 현대와 전통의 문제를 화두로 끌어올렸고 이후 신화와 전설까지도 표현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제 그의 작품은 비판적이고 왜곡된 인간 형태가 사라지고, 대신에 관조적인 자연풍경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연은 인간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삶과 역사와 깊게 관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나무 구름 바위 산 달 별 닭 말 대나무 등의 자연 속에 역사의 의미를 담아냈다. 자연과 역사의 조화가 이뤄진 셈이다. 

지난 96년 다섯 번째 개인전에 이어 열리는 이번 전시는 이러한 지금까지의 작품변화'자연>인간>인간+자연>자연+인간+역사'를 읽게 한다. 겹겹이 화선지를 붙이고 그 위의 주름과 마티에르 위에 되돌아보는 삶을 심는 그의 작품들은 이제 '고뇌와 고통'의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곳이 아닌 '인간회귀'의 자연 내음이 진한 팔당의 화실에서 제작되고 있다.
 팔당 시절의 그림은 우선 색채가 밝아졌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의 검고 어두운 무채색 계열의 색채가 줄어든 대신에 밝고 원색적인 색채가 화면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만큼 작품은 명랑하다. 그리고 화면의 운용이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어머니의 태내(胎內)같은 형상이나 의도적인 화면 분할이 이전의 작품과 궤를 같이 하고 있지만, 자연의 장식적인 표현과 우주의 기호적인 표현이 화면에 새롭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끊임없는 실험의 정신의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연속의 과정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